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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유한우 (劉旱雨)

ㆍ내용
조선의 개국 국풍(國風)
ㆍ시대
조선
ㆍ출생지
거창
ㆍ작성자
강 시 규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우사 유한우(雨師 劉旱雨)
- 조선의 개국 국풍(國風) -

 

선생(先生)의 본관은 거창(居昌)으로 초명은 이귀(利貴), 자는 천서(天瑞)요, 호는 망운·우사(望雲·雨師)이고 시호는 충희공(忠僖公)이며 시조 유전(劉荃)의 13세손이다. 시조 유전(劉荃)은 중국 송나라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으로 자는 원보(原甫)이고 호는 죽간(竹諫)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문양공의 장남인 도첨의 찬성사 견규(都僉議贊成事 堅規)는 공훈으로 거타군(居陀君)을 봉해졌고 둘째 아들 대사헌 견구(大司憲 堅矩)의 아들 숭록대부 웅열(崇祿大夫 雄悅) 역시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져서 거타의 개명칭인 지금 거창(居昌) 고을로, 자손들이 거창(居昌)으로 본관을 삼아 대대로 현달하였다. 고조 방준(妨俊)은 통사랑 공조좌랑(通仕郎工曹佐郎)이고, 증조 당우(唐佑)는 은율찰방(殷栗察訪)이요, 조부 정(靖)은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요, 부(父) 보군(補君)은 봉익대부 병조참의(奉翊大夫兵曹參議)이다.

선생(先生)은 1334년(고려 충숙왕 3년) 5월 5일 거창 미록리(居昌 彌祿里)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재능이 뛰어나 16세인 1349년(고려충정왕 원년)에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19세인 1352년(고려 공민왕 원년)에 문과 장원급제(文科 壯元及第)하였다. 1394년에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종3품), 1398년(태조7년)에 공조전서(工曹典書,정3품), 1405년(태종5년)에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1407년에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정2품), 1410년에 산릉순심사(山陵巡審使)가 되었다.

선생은 성품이 충직하고 효우(孝友)해서 당대에 명망이 높았으며 1423년(세종 5년) 10월 1일 향년 90세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거창군 고천면 계량동(古川面 繼良洞) 유좌(酉坐)의 언덕이며 천장지비(天藏地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배위(配位)는 증 정경부인 고성이씨(贈貞敬夫人固城李氏)로 우의정 이강(右議政 李岡)의 따님이며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방조(邦祚)는 한성좌윤(漢城左尹)이고 차남 안조(安祚)는 대광록경 군기감사(大光祿卿軍器監事)요, 삼남 응조(應祚)는 가선대부행 한성좌윤(嘉善大夫行漢城左尹)이며 사남 석조(碩祚)는 신계현령(新溪縣令)이요, 따님은 진양인 진사로서 교수(敎授)인 형박(邢愽)에게 시집갔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큰 가뭄이 몇 년 계속되자 조선에 명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하기에 선생(先生)이 추천되어 기우제관(祈雨祭官)으로 기우제를 지내자 3일 만에 큰 비가 내려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명 황제(朱元璋)는 한우(旱雨)라는 이름과 우사(雨師)라는 호(號)를 내렸고, 명나라에 10여 년을 머무르며 관직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내렸다. 우리 조정에 돌아와서 벼슬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에 19차례 기록되어 있으며, 국풍(國風)으로서 활동내역을 보면 도읍지(都邑地) 선정, 궁중 건물의 터 선정, 왕릉(王陵) 선정 등을 들 수 있다.

 

1. 도읍지 선정관련 내용

① 무악(毋岳)
태조 3년(1394.6.27.), 10여 재상들에게 명하여 무악으로 새 도읍지를 이미 결정하였는데, 서운관원(書雲觀員) 유한우(劉旱雨)와 이양달(李陽達) 등이 말하기를, ‘신이 배운 바로 보아서는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하였다.

태조 3년(1394.8.11.), 태조 일행이 무악에 도착하여 지리형세를 살펴보는 중에 서운관의 판사 윤신달(尹莘達, 부정 유한우(劉旱雨) 등이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는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서운관의 최융(崔融), 윤신달, 유한우 등이 상서(上書)하여 ‘우리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송악)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

 

② 한양(漢陽)
○ 태종 4년(1404.9.9.), 유한우(劉旱雨) 등을 보내 한경(漢京:한양)에 아궁(離宮)을 지을 자리를 잡도록 하였다.
○ 태종 4년(1404.10.4.), 한양(漢陽)과 무악(毋岳) 중 도읍으로 적정한 곳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여 유한우(劉旱雨)가 “한양은 전후에 석산(石山)이 험한데도 명당(明堂)에 물이 없으니, 도읍할 수 없습니다. 지리서(地理書)에 말하기를, ‘물의 흐름이 길지 않으면, 사람이 반드시 끊긴다.’하였으니, 대개 불가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땅도 또한 규국(規局)에 바로 합치하지는 아니합니다.”라고 고하였다.

 

2. 왕릉(王陵) 선정관련 내용

① 정릉(貞陵, 神德王后 康氏)
태조 5년(1396.8.20.), 태조가 서운관(書雲觀) 유한우(劉旱雨) 등과 행주(幸州)에 거둥하여 능지를 보았다.

 

② 순릉(純陵, 度祖의 妃 順敬王后 文州朴氏, 李成桂 祖母) 천장(遷葬)
태조 7년(1398.7.5.), 공조전서(工曹典書) 유한우(劉旱雨)가 동북면으로부터 돌아와서 전시에게 “순릉을 옮겨 장사하는데 석양(石羊)·석호(石虎)·석실(石室)의 난간이 매우 사치하고 화려합니다.”라고 비판하였다.

 

③ 제릉(齊陵, 태조 正妃 神懿王后 淸州韓氏)의 석란(石欄)과 석인(石人) 등의 설치
태조 8년(1408.3.10.), 제릉의 돌난간과 돌장승의 공사를 감독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박자청(朴子靑)과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 등에게 상을 내렸는데, 유한우(劉旱雨)에게 전지(田地) 40결(結)을 주었다.

 

④ 인소전(仁昭殿) 터 논의
태종 6년(1406.5.27.), 태종이 인소전(仁昭殿)을 창덕궁 북쪽에 다시 지으려고 서운관에 명하여 터를 잡게 하니, 유한우(劉旱雨)가 아뢰기를 “창덕궁 주산의 기운이 이 땅에 모였는데, 만약 땅을 파서 집을 지으면 반드시 궁궐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⑤ 건원릉(健元陵, 太祖 李成桂 陵)
태종 8년(1408.6.12.), 영의정부사 하륜(領議政府事 河崙)는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 등과 함께 산릉(山陵) 자리를 잡으려고 봉성(蓬城)의 길지를 살폈다.

태종 8년(1408.6.28.),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纂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영의정부사 하륜(領議政府事 河崙),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 등이 양주 검암(楊州 儉巖)에 건원릉 터를 살핀 후 능지로 선정하였다.

 

⑥ 산릉순심사(山陵巡審使)로 동북면(東北面) 왕릉을 살핌
태종 10년(1410.8.29.),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로 산릉순심사((山陵巡審使)를 삼아 동북면(東北面)에 가게 하였다.

 

⑦ 태종의 외증조부모인 영흥백 최씨(永興伯 崔氏)와 부인 묘 수축
태종 15년(1415.1.12.),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를 영길도(永吉道)로 보내어, 한식일(寒食日)에 영흥백 최씨(永興伯 崔氏)와 부인(夫人)의 묘를 가축(加築)하게 하였는데, 임금의 진외조고비(陳外祖考妣)이기 때문이다.

 

3. 궁중 건물의 터 선정관련 내용

① 태조 영전(太祖影殿)과 재궁(齋宮) 터 선정
태종 18년(1418.4.6.), 태종이 일찍이 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기를
“어배동(於背洞) 본궁(本宮)은 태조의 용흥(龍興)한 땅이니, 차마 황폐하여 구롱(丘壟)이 되게 할 수 없다. 영전(影殿)을 짓고자하니, 네가 가서 보라.” 용흥(龍興) 임금이 되는 것. 구롱(丘壟) 언덕.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유한우(劉旱雨)를 거느리고 상지(相地)하여 정하였다.

 

4.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 내용

태종 17년(1417.11.23.), (전략) 유한우(劉旱雨)는 일찍이 태조(太祖)의 잠저(潛邸)에서 시종하였고, 또 제릉(齊陵)의 땅을 잡는 여러 일을 모두 주장(主掌)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능실(陵室) 근처에 살게 하고, 겸하여 능침(陵寢)의 일을 규찰(糾察)하게 하였다. ··· (후략) 〈태종실록 34권〉

 

5. 임금 하사품관련 내용

① 제릉(齊陵, 태조 正妃 神懿王后 淸州韓氏) 비(碑) 터 선정(태종 4년,1404.2.18.)에 대한 하사품
태종 4년(1404.3.16.), 제릉의 비를 세우는데 공헌한 성석린·권근 등에게 잔치를 베풀고 상을 주었는데, 유한우(劉旱雨)에게는 터를 잡은 공로로 겹의(裌衣) 한 벌을 주었다.

 

② 제릉(齊陵, 태조 正妃 神懿王后 淸州韓氏)의 석란(石欄)과 석인(石人) 등의 설치에 대한 하사품
태종 8년(1408.3.10.), 제릉의 돌난간과 돌장승의 공사를 감독한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 등에게 상을 내렸는데, 유한우에게는 전지(田地) 40결(結)을 주었다.

 

③ 선릉(先陵)의 능터를 잡은 공에 대한 하사품
태종 12년(1412.1.10.),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에게 쌀·콩 20석을 내려 주었으니, 유한우가 상지(相地)하여 선릉(先陵)에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선생은 국풍(國風)으로서 조선 왕조의 도읍지(한양) 천도에 참여하였고, 궁중 건물의 터와 건원릉(健元陵) 등 많은 왕릉(王陵)을 상지(相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선생의 묘비는 거창군 남상면 둔동 마을에서 뒷산인 망운봉 쪽 산중턱에 있다. 당초 묘 앞에 세워진 비석은 세대가 오래되고 전쟁과 화재를 여러 번 지내서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겨서 거칠어졌다. 이에 새 비석을 1856년(철종 7) 세웠는데, 이 비는 화강암 대석 위에 양질의 청색 비신을 세우고 개석은 장방형으로 번개무늬 조각이 눈길을 끌게 한다. 앞에 있는 문인석은 마모가 심하여 조선 초기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참고문헌】
『거창군사』, 거창군사편찬위원회, 1997.
『거창역사』, 거창군, 1991.
『거창금석문대관』, 거창문화원, 2009.
『유씨대동보』, 유씨대동보편찬위원회, 1975.
『조선왕조실록』.


강 시 규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출처
  • 거창향토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