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문화와 역사

거창군
정습인 (鄭習仁)
현숙(顯叔) 정습인(鄭習仁)
선생의 이름은 습인(習仁,1328-1379), 자는 현숙(顯叔)이고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고려 시중 광유후(光儒侯) 홍문공(弘文公) 배걸(倍傑)의 후예로서 시중공의 아들 정간공(貞簡公) 문(文)의 후손이다.
선생은 공민왕 4년 을미년(1355)에 문과 3등 제2인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學官)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영주지사(榮州知事)로 외직에 근무하였다. 직임을 시작하기 전에 주의 아전이 전례에 따라 〈소재도(消災圖): 재앙을 없애는 그림〉 앞에 나가 분향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선생은,
“신하가 떳떳한 도리가 아닌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어찌 재앙이 생기겠는가? 만약 재앙이 생기면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겠다.”
고 하면서 그 사당을 철거하도록 하였다.
영주에 무신탑(無信塔)이라는 전탑(塼塔)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당시 「고려 공민왕 때(재위:1352-1374) 군수(知榮州) 정습인(鄭習仁)이 영주(榮州)에 ‘무신(無信)’이란 탑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선생이 말했다.
“괴이하다. 나쁜 나무 아래서는 쉬지를 않고, 도둑의 샘물을 마시지 않는 것은 그 나쁜 이름을 꺼리기 때문인데 우뚝 솟은 형태로 온 고을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데도 어찌 이름은 ‘믿음이 없다’고 지었는가?”
그리고는 그 ‘무신탑’을 허물고 그 벽돌로 빈관(賓館: 객관)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몇 개월 뒤에 신돈(辛旽)이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경주의 옥에 가두었다가 몇 달 뒤 다시 전법(典法)으로 이감하여 그를 괴롭혔다. 신돈은 선생을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극력 구원하여 탑을 복원하는 조건으로 죽음은 면하고 관직이 삭탈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어 풀려났다.
후에 신돈이 처형되자 다시 기용되어 지양주시(知梁州事),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를 역임했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지역 권세가를 누르고 음사(淫祀)를 금지시켰다.
우왕(禑王) 때 다시 전교령(典校令)에 제수되었다. 이때 일본이 고려에 사신을 보낸 답방 사신으로 선생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승려였던 일본 사신이 선생의 이름을 듣고는,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
면서 사신을 교체해 주기를 요구하자 선생은
마침내 사행(使行)을 가지 않았다.
선생은 모친이 돌아 가시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이와 똑 같이 하면서 그지없이 슬퍼하고 애통해하였으므로, 칭송하는 사람이 많았다. 상중에 일체의 범절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맞게 상례를 실천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 되었다. 이때 왕이 남경(南京: 현 서울)에서 송도로 돌아올 때 일관이 길일을 택했는데, 왕이 그날은 왕비에게 좋지 않은 날이라고 하여 일부러 날짜를 늦추기 위해 우회로로 입경하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우산기(右散騎) 진의귀(陳義貴)와 함께,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라며 간언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기며,
“너는 재상이 천거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등용하였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고 하여, 선생이 물러나왔다.
얼마 뒤에 윤구택(尹龜澤)의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방으로 유배되었다.
선생의 성품은 곧은 절개가 있어서 거리낌 없이 직언을 하여 이름이 드러났다. 이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가 시를 지어 노래했고, 문충공(文忠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기문을 지어 찬양했으며,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전(傳)을 지어 공경하였다. 이런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열전,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 등에 나타나 있다.
또한, 목은 이색이 찬한 안문경공(安文敬公) 보(輔)의 묘지명에 (전략) “불교를 배척하고 오도(吾道)를 일으켜 세운 이는 초계(草溪)의 정습인(鄭習仁)이요”, (후략)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통한 유교적 윤리도덕을 중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묘는 실전되었으며,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에 있는 방지재(芳池齋) 뜰 아래 단을 세웠다.
【참고문헌】
『영남인물지』, 112쪽.
『초계정씨 경신대보』 1권, 5쪽.
『동계선생문집』 연보 중 〈계도후록(系圖後錄)〉.
박 기 용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