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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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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이예 (李芮)

ㆍ내용
거창입향조 고려충신
ㆍ시대
고려
ㆍ출생지
미상
ㆍ작성자
정 시 균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강천(薑川) 이예(李芮)
- 거창입향조 고려충신 -

 

문질공 이예(文質公李芮) 선생의 관향(貫鄕)은 합천(陜川)으로 호(號)는 강천(薑川)이요, 시(諡)는 문질(文質)이다. 서기 1351년(高麗忠定王 辛卯)에 문과등제(文科登第)하였고,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으며, 처음에 합천 이사례(陜川伊士禮)에 살다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을 찾아 이곳 감음(感陰:위천)땅 강천동(薑川洞)에 옮겨 살았다.

선생은 주염계(周염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였다. 항상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을 외우며 일찍이 이르되 성현도학(聖賢道學)의 오점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후학들이여 어찌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있으리오. 대저 충효(忠孝)의 도리는 사람이 타고난 떳떳한 성품이며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일이라. 금은(金銀) 만 상자(萬箱子)가 충효(忠孝)두 글자만 같지 못할지니라. 또한 시(詩)에 이르기를 “성왕(聖王)의 부름 받았으니 어이 주저하리오.
다투어 서울 행차 하려하네.
영광(榮光)스런 녹봉을 즐겁다 하지마라.
신상(臣上)되어 자리만 지킨 일들 부끄러워라 하였고,
인끈 풀고 돌아오니 백발의 한 늙은이 초라한 초가삼간 숲속에 쌓였구나.
산도 영경(靈境) 그대로며 물도 진원(眞源) 그대로라.
반생(半生)의 부명(浮名)은 도리어 부끄럽고
만물(萬物)의 이치(理致) 조용히 살펴보니 오히려 즐겁구나.
오동나무 달빛 버들 바람이 가을인듯 하여라.”

선생은 평소에 충효(忠孝) 두 글자를 게시하여 행려절의(行礪節義)의 신조로 삼았고, 만년(晩年)에는 임천에 묻혀 후진교화(後進敎化)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고결한 사상과 도덕을 기려 후인들이 금계서원(金溪書院)에 향사하다가 국령에 의하여 서원이 훼철되자 안의 대덕사(安義大德祠)에서 춘추향사(春秋享祀)하고 강천재(薑川齋)옆에 선생을 기리는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는 1938(무인년) 중추(8월) 하순에 세운 것인데 해평 윤영구가 짓고 하동 정승현이 쓰고 초계 정태균이 전을 썼다.

강천 이선생(薑川 李先生)의 신도비(神道碑)가 이루어짐에 후손들이 모두 의논하여 선생의 사실을 기록하여 불영(不侫)에게 신도비명을 요청하니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諱)는 예(芮)요 본관은 합천(陜川)이다. 고려조(高麗朝) 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문질(文質)이며 호는 강천선생(薑川先生)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일컬었던 것이다. 시조의 휘는 알평(謁平)이니 표암(瓢岩) 아래에서 강생(降生)하여 신라(新羅)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고, 후에 천여세(千餘歲)에 계대(系代)와 후손을 실전(失傳)했다. 강양군 휘 개(江陽郡諱開)가 비로소 휘 인영(仁榮)을 낳았으니 평장사(平章事)였고, 휘 돈(惇)을 낳으니 중랑장(中郞將)이며, 휘 익서(益瑞)를 낳으니 시랑(侍郞)이었고, 휘 존순(存淳)을 낳으니 좌복야(左僕射)이며, 휘 덕손(德孫)을 낳으니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시호가 장숙공(莊淑公)이고, 휘 설(偰)을 낳으니 찬성사(贊成事)이며, 휘 원분(元賁)을 낳으니 중랑장(中郞將)이었고, 휘 양진(良眞)을 낳으니 참지정사(參知政事) 였으며 휘 규(圭)를 낳으니 예의판서(禮儀判書)였고, 휘 수장(守長)을 낳으니 한람학사(翰林學士)요, 휘 예(芮)를 낳으니 곧 선생이시다. 강양군(江陽君)으로부터 대대로 충훈(忠勳)과 곧은 절개가 있어서 드디어 동방(東方)에 저명한 씨족이 되었다.

선생이 처음에는 합천 이사례(伊士禮)에 살다가 뒤에 안의 강천동(安義薑川洞)에 살았으므로 인하여 강천으로 호를 삼았다. 강천은 산수(山水)가 좋은 고장이라 선생(先生)이 즐거움으로써 취미를 붙였으니 대개 인산지수(仁山智水)에서 나온 것이다. 항상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을 외우고 주자(周子)의 태극도(太極圖)보기를 기뻐하여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두었다. 또 충효(忠孝)의 두 글자는 벽상(壁上)에 써서 항시 보고 마음에 새기었으며 삼자(三子:세 아들)를 가르치어 이르되
“황금(黃金)이 상자에 가득함이 너희들에게 충효(忠孝)의 두 글자를 내려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이르되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 기쁘게 해드리듯 할 것이니,
충효는 본래 진심(眞心)에서 우러남이라.
선성들은 다만 여기에서 말미암았는데,
슬프다! 우리 후학(後學)의 사람이여!“
라하고, 또 이르되
“성군(聖君)의 세상에 부름받고 감히 멍에 메기를 기다릴까,
시골 사람이 다투어 조회의 행차에 부임함을 축하하리라.
영화의 길과 두터운 녹봉(祿俸)을 즐겁다 이르지 마오.
다만 신료(臣僚)라는 시위소찬(尸位素餐:직책을 다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함)이 부끄럽기만 하다.“
하고 또 이르되
“직책을 풀고 돌아와서 벼슬 없이,
작은 재실(齋室)을 숲과 연못 아늑한 곳에 지었노라.
산(山)은 신령한 지경에 열리어 맑고 높이 서 있고,
물은 진원(眞源)을 얻어 활발하게 흐르네.
반평생 뜬 이름 부끄럽기만 하고,
한가한 사람의 생계(生計)로는 다시 구할 것이 없어라.
고요히 물리(物理)를 보매 오히려 즐겁기만 한데,
오동나무 달과 버드나무 바람이 상쾌하여 가을이 다가온듯 하여라.”
하였으니, 다만 이 수구(數句)로도 또한 가히 선생의 뜻을 대강 볼 수 있도다. 도학(道學)이 늙으면서 더욱 돈독하여 하늘을 즐거워하며 운명을 알다가 돌아가시니 문질(文質)의 시호를 내리었다.

안의(安義)의 강천동(薑川洞)에 안장(安葬)하였는데 순조계해(純祖癸亥:1803)에 관찰사 정만석공(觀察使 鄭晩錫公)이 안의 고을에 순행 나왔다가 선생의 실적(實跡)을 흠모하여, 사우(祠宇)를 세우라는 지시가 있으므로 사림(士林)의 의논이 같은 시기에 일제히 일어나서 이예 원사(院祠)를 건립하고 선생의 중자 원달(仲子元達)과 영계공 유환(瀯溪公 劉懽)과 확계공 정옥견(蠖溪公 鄭玉堅) 등이 더불어 같이 배향되었다. 서원(書院)이 철거된 후에 자손(子孫)이 사모할 곳이 없으므로 고종 임인(高宗壬寅:1902)에 강천재(薑川齋)를 중건(重建)하고 단소(壇所)를 모아 제향(祭享)을 지낸다.

배(配)는 정경부인 안음서문씨(貞敬夫人 安陰西門氏)니 진사로 검상(檢詳)을 지낸 질(秩)따님이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의 휘는 인달(仁達)이니 문과(文科)로 판서(判書)요, 다음의 휘는 원달(元達)이니 문과(文科)로 참판(叅判)인데 고려(高麗)의 운수가 장차 다함을 알고 금원산(金猿山)에 은거하여 이조(이조(李朝)에서 여러 차례 예(禮)로 맞으려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드디어 굶어서 마치었으며, 다음의 휘는 충달(忠達)이니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내었다. 여서(女婿:사위) 반숙(潘淑)은 좌윤(左尹)이고, 다음 여서(女壻)는 이세방(李世芳)이다.
휘 흥의(興義)는 판서(判書)요, 휘 정의(貞義) 는 참의(參議)요, 휘 즙(楫)은 유수(留守)요, 휘 연(椽)은 군수(郡守)니 장방(長房)의 소생이다. 여서 거창유환(女壻居昌劉懽)은 밀직사사(密直司事)로 중방(仲房)의 소생이다. 만호(萬戶)를 지낸 휘 권(權)과 문과에 급제해 지평(持平)을 지낸 휘 평(枰)은 계방(季房)의 소생인데 가풍(家風)을 추락시키지 않고 후손(後孫)을 잘 감싸주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아! 선생의 세대가 지금 요원한데, 불행히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문헌(文獻)이 병화(兵火) 속에 유실되어 당일의 사적(事蹟)을 고증할 수 가 없으니 어찌 후손(後孫)의 한스러움이 아니리오. 그러나 행장(行狀)을 지은 자는 선생의 칠세손 종신(七世孫宗愼)이고, 과연 증거할 만한 자는 진사 최연중(進士崔演重), 장령 신성진(掌令慎性眞), 참찬 곽종석(參贊郭鍾錫, 침랑 정재규(침랑(寢郞:參奉 鄭載圭), 교리 정연시(校理鄭然時) 제공(諸公)들이니, 기록과 서술(敍述)한 가운데서 생각하여 알 수가 있다. 명으로 이으니 명(銘)에 이르되 강양(江陽)의 옛 집안에서 돈독한 철인(哲人)을 낳았는데 임금을 사랑하고 부모를 기쁘게 하여 충효가 진실하였지.
강천위에 용감하게 물러와 높은 종적 머물러 있네.
맹자의 호연장과 주렴계의 태극도를 배우고 연구하여
사물 이치를 즐거워하였으니 버들가지 바람과 오동나무 달이었지.
세상에서 추대하여 종장(宗匠:주장과 주인)을 삼았으니 문장과 도덕이네.
금계의 서원에 제향(祭享)을 창설하였으니
선생의 유풍(遺風)은 백세(百世)인들 과연 잊으랴.
후생(後生)이 높이 우러러 외람되이 명사(名辭)를 가름하노라

【참고문헌】
『거창금석문대관』, 거창문화원, 2009.
『위천면지』, 위천면편찬위원회, 1998.
『거창군사』, 거창군사편찬위원회, 1997.
『거창향지』, 거창군, 1982.
『거창역사』, 거창군, 1991.


정 시 균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