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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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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장두민 (章斗民)

ㆍ내용
홍건적을 물리치고 아림군으로 봉해진 거창장씨 입향조
ㆍ시대
고려
ㆍ출생지
거창 (추정)
ㆍ작성자
이 점 국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장두민(章斗民)
- 홍건적을 물리치고 아림군으로 봉해진 거창장씨 입향조 -

 

거창장씨(居昌章氏)의 시조인 평보(平甫) 장종행(章宗行)은 중국 송나라의 인물로, 장(章)씨는 중국 하북성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고려 충렬왕 때 중국으로부터 귀화했는데,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版圖) 판서(判書)를 거쳐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아들인 장두민(章斗民)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들이 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군사들을 지휘하여 개경으로부터 홍건적(紅巾賊)을 몰아내어 국란의 위기를 극복한 무훈을 세우자, 이에 대한 공로로 공민왕이 거창의 별호인 아림군(娥林君)에 봉해 졌으므로 본관(本貫)을 거창(居昌)으로 하게 되었다.

아림군은 회헌(晦軒) 안문성공(安文成公)의 외손자이고, 또 역동선생 우탁(禹倬)의 사위이다.

중국 남송 덕우(德祐) 때에 우승상 감(鑑)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얼마되지 않아서 오랑캐인 원 나라가 들어섰다. 그러자 자손이 동방으로 피하였는데, 충헌공 종행(宗行)이 고려 충렬왕을 섬겨 벼슬이 판도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그 아들 두민(斗民)이 충숙왕을 섬겨 벼슬이 시중 판삼사사를 지냈는데, 충혜왕이 원 나라에 잡혀갈 때는 같이 호송함에 수고를 다하였고, 공민왕 때는 안우(安祐)·정세운(鄭世雲) 등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개성을 수복하였다, 이 공로로 이림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지금의 거창이다. 이 분이 영순(永巡)을 낳으니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이었고, 이 분이 대장(大莊)을 낳으니 벼슬이 부정에 이르렀다.

이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면서 고려 신하로서 지조를 버리지 않고, 스스로 둔와(遯窩)라고 호를 지었다. 그 아들 통덕랑 현(顯)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드디어 내려와 향역(鄕役:호장)이 되었고, 그 아들 장사랑 구성(九成)이 또한 은거하여 스스로 학식이 없는 체 하면서도, 충성과 의리로 여러 아들에게 깨우치도록 힘썼었다. 이때 이후부터 그 자손이 번성하여 어떤 세대에는 벼슬이 낮은 신분에서 훌륭한 공적을 세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겨우 호적에 편입된 신분에서도 문장가의 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러 그 뼈와 핏속 깊이 관통하여 흐르던 것이 때때로 은거하여 적적한 가운데서도 나타났으니, 처사 요(堯) 같은 분은 효도와 우애를 즐거이 베풀었고, 교수 응하(應河) 같은 분은 경학을 실천하여 참으로 고을의 칭송을 받고 유림을 빛내기에 넉넉하였다. 만약 국난을 당하여 충의를 떨치고 일어난 사람이 있다면 판관 헌휘(獻輝)와 참의로 증직된 헌부(獻富)가 있으니 임진왜란때 순절하였고, 또 승지로 증직된 만리(萬里)가 의주에서 선조임금을 호종하였고, 만호 일남(逸男)이 이괄의 난리 때 공주 쌍수(雙樹)에서 인조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의사 봉익(鳳翼)은 고을의 인사들과 모의하여 정희량의 무신년 난리를 힘써 막아내었으니, 이러한 사실이 또한 어찌 열렬하고 당당하지 아니하며, 또 어찌 선열을 받들고 그것을 오는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점점 떨쳐 창대하게 할 재료로 삼기에 부족할 것이며, 또 어찌 오늘에 적막하다고 해서 곧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건계정(建溪亭)은 위천(渭川) 유역의 반석 위에 세워진 정자인데, 건계정은 물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형상의 거북바위(일명 구배석) 등 부분에 지어져 있는 정자로 건계정 뒤 뜰에는 아림군 장공 세적비(娥林君章公世蹟碑)가 있다. 1905년 건계정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이 비는 귀수부 형태를 갖추었고 주위에는 낮은 돌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문은 한말의 대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면우 곽종석(郭鍾錫)이 지었다.

 

면우 선생이 명을 하였으니,

장씨(章氏)는 아득한 옛날 건계에서 살았고, 연부인은 덕이 있어 성(城)을 온전히 지킨 부처라.
하늘이 복으로 자손을 창대케 하니, 저손 대대로 아름다은 소리 무성하도다.
몽필산에는 독서당이 있고, 경력 연간의 문헌공은 당대 문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네.
장간공은 장사의 꾀를 이어서, 서쪽 오란캐를 매로 때리듯이 쫓아냈고,
용감한 충각공은 역적을 꾸짖어서 평강에 뛰어난 업적이 우뚝하거늘,
하물며 저 당(黨)에 속한 자들의 참소에는 명예가 빛났고, 송나라 큰 선비 주자와 그 이름이 나란하니,
휼륭한 인재가 아름다움을 따른 사람이 많아서, 마침내 송나라에 모두 벼슬로 아름다웠다.
갑자기 원나라기 일어나니 깜짝 놀라서, 표연이 배를 타고 동방으로 건너 왔구나.
판도판서 벼슬은 선조의 음덕이니, 죽계선생은 두 부인을 맞이하였다.
아들이 있었으니 아름다운 이름 널리 떨쳐 벼슬은 시중에 이르렀고, 위난을 당하여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홍건적의 침입에 죽기를 무릅 쓰고 개성을 수복하여 방울 울리며 개선하니 공신에 책록되어,
이림군에 봉해져서 후손을 넉넉케하였으니 광명에 빛나는 중화의 모범이라.
고려가 망하니 지사(志士)가 탄식하고 자손들이 그 뜻을 받들어 휼륭한 절개를 지키며, 은거하였어도 스스로
후회함 없이 오히려 자손에게 물려준 가르침은 의열(毅烈)을 떨치는 것이라.
성 지키기를 청하여 공로를 세우고 그 공적 높이 들어 쌍정(雙旌)을 세웠도다.
건흥산(乾興山) 푸르고 영수(瀯水)는 길었는데, 하루 아침에 새 정자가 우뚝하다.
영수가 굽이치니 중국의 건계(建溪) 같아, 양양한 옛 덕이 쉬지않고 흐르도다.
돌을 깍아 사작 새겨 후세에 전하니 자손들이 이어서 마땅히 창성하리.

 

거창 건계정(居昌 建溪亭)은 거창 장씨 선조인 장두민(章斗民)의 공을 추모하고 거창장씨(居昌章氏) 조상의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1905년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된 것이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의 주돈이와 주자 두 선생의 염계(簾係)와 자양(紫陽)을 본 딴 것으로 거창 장씨의 시조가 중국 건주(建州)에서 고려로 귀화하여 후손들이 선조의 고향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면우 곽종석이 이름 붙였다. 정자 외에 재실인 보은재(報恩齋) 및 사적비를 주변에 건립하였다.

건계정은 거창의 진산인 건흥산 남사면부에 계곡부와 거창의 위천이 만나는 곳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으로 불규칙적인 암반 위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누하주(樓下柱)의 높이는 제각각이고 누마루는 통칸마루형이며 배면 중앙칸에 판벽을 설치하였다. 공포 양식은 초익공 형식이고 상부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5량가이며 단청이 시문(施紋)되어 있다.

 

【참고자료】
『거창금석문대관』, 거창문화원, 2009.
『거창장씨족보』


이 점 국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출처
  • 거창향토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