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문화와 역사

거창군
박유 (朴儒)
박유(朴儒)
- 신라 충신의 높은 충절 -
고려 태조의 위대한 인격과 도량과 수완 그리고 그의 탁월한 회유책에는 신라, 태봉, 후백제, 말갈 할 것 없이 옛 삼한지역의 식자들은 다투어 새 천지 새 군주에게 충성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우리 고장 선비 박유(朴儒)선생은 조국인 신라에 대한 충절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신라 진성여왕의 난정을 풍자하다가 그 혐의를 받고 옥중에 갇히게 된 합천의 은자(隱者)인 거인(巨仁)과 동시대(同時代)의 도학자이며 지역적으로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니 아마 사제(師弟) 사이나 도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문과 지조가 굳어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여러번 벼슬하면서 자기를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신라에 대한 충절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태조의 간청은 심해지기 때문에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입산하니 그 산이 바로 박유산(朴儒山)이였던 것이다. 후인들이 박유(朴儒)선생의 높은 충절을 찬양하여 칭하게 된 이름이리라.
옛적 운봉현감을 지낸 고은(孤隱) 이지활(李智活) 선생께서 거창 박유산(朴儒山) 속에서 박유(朴儒)에게 제문을 지어 제주를 올렸으니 박유처사는 고려 왕조에 벼슬하지 않은 자인데 그 유풍을 듣고 사모하여 제문을 지었다고 고은(孤隱)선생 실기에 전한다.
박유에게 제사 지내는 글(祭朴儒文)
아림의 동쪽에 산이 있으니 크고도 아득해라. 娥林之東有山縹渺
옛 노인 전설대로 주인공의 높은 품위 故老傳說主人高標
은나라의 서산이요, 진나라의 시상이로다. 殷之西山普之柴桑
아득히 높은 풍모 저산 위에 머무르고 邈矣高風留彼崇岡
붉은 언덕 푸른 벼랑 유적이 방불하니 丹崖靑壁彷佛遺塵
아! 이분 아니었다면 내 뉘와 더불어 이웃하리오. 噫微斯人吾誰與隣
조선조 인조시 가북 용산 출신의 정필달(鄭必達.1611~1694)이 읊은 시
높은 선비가 높은 산과 더불어 있으니 高士與高山
어느 것이 높은지 분간키 어렵구나. 高高高孰避
산 이름이 선비로 인해 전하니 山名以士傳
아마도 선비는 산보다 높을 것이다. 山未高於士
조선조 가조 기동 출신의 이익(李益.1655~1736)이 읊은 시
일발의 푸른 산 오랜 석대에 日髮靑山古石臺
석인(큰인물)의 옛 자취 푸른 이끼에 파묻혔네. 碩人遺躅沒蒼苔
사람 돌아가고 산만 있다고 말하지 마소 莫言人去山惟在
산 무너지지 않을 때 이름도 없어지지 않네. 山不頹時名不灰
조선조 가조 기동출신의 이일협(李逸協.1750~1808)의 박유산기
박유산은 신라 박처사의 은거했던 곳으로 후인들이 인하여 박유로서 이름을 지었으니 진나라 사람 노오가 은거했던 곳이 노산이 된 사실이 있도다. 지금 박유가 가신 때가 멀어 그 사람됨이 상세하지 못하고 지지에는 염선생(후한의 엄광)의 절의가 있다고 칭송 했으며 징벽해도 기용되려고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뜻이 고상하여 고려를 섬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제 박유산으로 박유를 상상한다면 초목이 우거지듯 깊숙하고 빼어났으며 은거하는 군자의 기풍이 있었으며 뛰어나게 홀로 우뚝하여 대장부의 절의가 있었으며 징벽해도 기용되려고 않았으니 부귀에 굴복하는 자가 아니었으며 은거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했으니 빈천하다고 뜻이 옮겨갈 자가 아니었다. 박유는 산을 얻어서 이름이 전해지고 산은 박유를 얻어서 높은데서 더욱 높아졌으며, 산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박유의 이름도 없으지지 않으리니 박유의 풍도는 길이 있으리라. 그러하니 박유의 풍도는 산고수장이라 말할 만하도다.
朴儒山記
朴儒山 新羅朴處士之所隱居 而後人 因以朴儒名焉 有秦人盧敖之所隱 爲盧山也 今去朴儒 時遠矣 固不詳其爲人然 誌地者 稱以有嚴先生之節 而徵辟不起 則是必高尙不事者也 今以 朴儒山 而想像朴儒 蔚然深秀 有隱君子之風 挺然特立 有大丈夫之節 徵辟不起 則不爲富貴屈者也 隱居自樂 則不爲貧賤移者也 朴儒得山而名以傳 山得朴儒 而高益高 山不頹則朴儒之名不朽矣 名不朽 則朴儒之風 長在矣 然則朴儒之風 可謂山高而水長矣
거창부여지승람 거창부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처사 박유는 고려 태조때 여러번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가 은거한 산을 박유산이라 하였다.』
『朴儒山 在加祚縣南五里 金貴山南麓 新羅處士朴儒 麗太祖時累被徵 不任隱居 于此後人仍名 朴儒山遺址尙存』
박유산 북편(동례마을 서남쪽) 7부 능선에 처사바위가 있으며 바위에는 ‘박처사둔세소(朴處士遯世所)’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때 누구가 새겼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 우측에는 ‘이고은망북암(李孤隱望北岩)’이라 새겨져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 어느 사람이 익명으로 정치와 행정을 비방하는 글을 적어 저작거리에 돌며 나열하여 대자보에 붙이는 일이 있자 이 소식을 들은 진성여왕은 유사에게 명령하여 수색하게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어느 신하가 진성여왕에게 "이는 반드시 자기의 뜻을 얻지 못한 문인의 소행일 것으로 보아 필시 대야주(大耶州: 경남 합천군) 깊은 산골에 묻혀 사는 거인(巨仁)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진성여왕이 명령하여 거인을 잡아와, 감옥에 가두게 하고 장차 형장을 가하려고 할 때, 거인이 억울하고 원통하여 감옥 벽에다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우공이 통곡할 때, 3년 동안 날이 가물었고 于公慟哭三年旱
추연이 슬픔을 품으면 5월에도 서리가 내렸도다. 鄒衍含悲五月霜
지금 나의 근심도 예와 다름이 없건만 今我幽愁還似古
황천은 아무 말 없이 푸르기만 하네. 皇天無語但蒼蒼
그날 저녁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치고 우박이 쏟아지자, 진성여왕은 두려워하여 거인을 놓아주었다.
한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 어떤 학자는 고려 태조의 부름을 받고 출사했다고 그의 충절을 비하하기도 하나 거창에 회자하는 박유처사와는 동명이인 일것으로 추측 된다.
918년 궁예를 축출한 여러 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왕건(王建)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다시 옮겼다. 고려 태조는 936년에 군현제를 원칙으로 하는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고려 태조의 지방제도 개편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에 세거하였던 지방세력을 회유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이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춘천은 광해주에서 춘주(春州)로 고쳐지게 되었고, 그 당시 춘천지역에는 신라말에 세거하였던 호족이 존재하였으니, 그 세력이 박유(朴儒)였다.
① (태조 원년 6월)계해에 은사(隱士) 박유가 와서 뵈니 관(冠)과 대(帶)를 주었다.
(『고려사』 권 1, 태조세가1, 태조 원년 조)
② 본 성명은 박유(朴儒), 자(字)는 문행(文行), 광해주 사람으로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궁예의 원외(員外)로 처음 벼슬에 나갔으며,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다. 궁예의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보고 출가하여 산곡(山谷) 사이에 숨었다가 태조가 즉위한 것을 듣고 태조에게 와 뵙자 (태조가)예로서 대하며 말하기를 "좋은 정치를 하는 도는 오직 어진 사람을 구하는데 있는데, 이제 경이 온 것은 어진 재상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하고, 관대(冠帶)를 내리고 기요(機要: 중 요한 일)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공(功)이 있자 드디어 성(姓)을 내려 왕씨로 하였다. (『고려사』권92, 열전5, 왕유조)
이를 통하여 볼 때 춘천지역에 박유라는 호족세력이 존재하였으며, 그에게 사성(賜姓)하여 이 지역에 대한 세력을 인정하고, 또한 자신의 세력으로 편제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②에 의하면 박유는 처음에 궁예를 섬겨 동궁기실이 되었다고 한다. 이 동궁기실은 태자를 교육하는 일이었는데, 그가 이러한 일을 맡았다는 것은 궁예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유는 궁예의 폭정을 피하여 산곡에 숨어들었다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 다시 정치로 돌아온다. 그리고 위 사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태조 왕건으로부터 성(姓)을 받기도 하고 그의 딸은 태조의 부인이 되기도 한다. 즉 태조 왕건의 호족 연합정책에 의하여 박유의 딸도 왕건의 부인이 되며 이러한 관계에 의하여 춘천지역은 박유의 세력기반으로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유산에 은거한 박유(朴儒)는 가조지역에서는 박유처사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박씨성(朴)을 가진 선비(儒)로 해석 할 수 있다. 박유산 처사바위에는 ‘박처사둔세소(朴處士遯世所)’라고 암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박처사가 그 당시 고려에 투항하여 벼슬을 했다면 이 고을에 사는 선비들이 계속적으로 신라 충신이라고 했겠는가? 박유처사가 은거하자 그 뒤 고려말 판도판서 전충수가 은거했고 단종 충신 이고은이 은거했으며 충신 이시익이 또한 박유산하 동례로 은거, 공신 오세창이 또한 박유산 아래 안금에 은거 하지 않았는가?
「거창부읍지(居昌府邑誌,1832년)」 기록에
"박유산은 부의 동쪽 30리이 있다. 고려 처사 박유가 중국에 징입(徵入)되어 갔으나 벼슬을 살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이곳에 은거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때문에 이름지어 박유산이라 했다. 산 위에 유지가 있다."
또한 1922~1937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의 기록에 박유산(朴儒山)조에
"신라 처사 박유(朴儒)가 고려 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중국에 들어가 출사하지 않다가 귀국하여 여기서 살았음으로 이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창역사(1991,거창군 발행) 가조 출신 오환숙 선생이 집필한 박유의 높은 충절의 내용에 의하면 박유선생은 신라 말엽 가소현의 사람이라고 한다. 금귀산(金貴山)의 남쪽 조그마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왕조실록에 기록된 박유(朴儒)는 춘천지역의 인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 춘천지역 인근에 은거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거창 가조에 은거한 박유(朴儒)는 가조 인근지역 인물로 추정 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여지승람, 거창군지, 거창역사(1991), 거창군사(1997), 가조면지(2016), 고은선생실기.
이 점 국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