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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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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우륵 (于勒)

ㆍ내용
거창 출신의 악사
ㆍ시대
가야국
ㆍ출생지
거창 (추정)
ㆍ작성자
오 필 제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우륵(于勒) - 거창 출신의 악사 -

 

우륵(于勒, 생몰 미상) 가야국 성열현(省熱縣) 사람 즉, 거창군 가조면 생초(省草) 출신의 악사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관련 기록에 의하면,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은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加耶琴)을 만들고는,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르니 그 음성을 어찌 통일할 수 있을까? 하면서 곧 악사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짓도록 하였다. 이에 우륵이 제작한 12곡은 1은 하가라도(下加羅都), 2는 상가라도(上加羅都), 3은 보기(寶伎), 4는 달사(達巳), 5는 사물(思勿), 6은 물혜(物兮), 7은 하기물(下奇物), 8은 사자기(師子伎), 9는 거열(居熱), 10은 사팔혜(沙八兮), 11은 이사(爾赦), 12는 상기물(上奇勿)이다. 여기에 우륵의 제자 니문(泥文)이 3곡을 지으니 1은 오(烏), 2는 서(鼠), 3은 순(鶉)이다.”

 
뒤에 우륵은 그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화 하였다. 왕은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 충주)에서 편히 살게 하고는 대나마(大奈麻) 법지(法知)·계고(階古)와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파견하여 그 업(業)을 전수하게 하였다. 이들 3명은 우륵의 11곡을 전수받고는 “이는 번거롭고 음란하여 아름답고 바르지 못하다”하고, 드디어 이를 5곡으로 간략하게 만들었다. 우륵은 처음에는 이것을 듣고 노하였으나 마침내 그 다섯 가지의 곡조를 듣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애련하면서도 슬프지 아니하니, 가히 바른 음악이라고 이를 것이다”하고는, 그 곡을 임금 앞에서 연주하게 하니 왕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때에 신하가 간하여 제의하기를 “이는 가야국의 망한 나라 음률이니 가히 취할 것이 못 됩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은 음란하여 멸망하였다 하다라도 음악이야 어찌 죄가 될 것인가? 이는 다 성인이 악법을 제정하는데 인정에 연유하여 법도를 따르게 한 것이니, 나라가 잘 다스려 지고 어려운 것은 음조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하고 드디어는 이를 행하게 하여 위대한 음악으로 만들었다. 가야금은 2조가 있는데 1은 하림조(河臨調)이고, 2는 눈눅조(嫩竹調)로서 모두 185곡이다.

 

<우륵의 고향 성열현은 가조 생초>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省熱縣)」에 대해서는 그간에 ①「의령설(宜寧說)」 ②「고령설(高靈說)」이 전해 왔으나 ①의령설은 1949년 일본역사학자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논문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와 그의 제자 다나까(田中俊明)의 승계에 의한 것이고 ②「고령설」은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1993년 김태식(金泰植)의 「가야연맹사(加耶聠盟史)」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설(說)은 쓰에마쓰 (末松保和)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에 의한 음상사(音相似)를 근거로「성열(省熱)」을 의령과 고령에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일 뿐 음운학적(音韻學的)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한계점이 있다. 이러한 중에 당시 경북대학교 국문학교수였던 김종택(金鍾澤)은 논문 「우륵의 고향 ‘省熱’은 어디인가?」에서 음운학적 분석을 통해 우륵의 고향 성열은 거창군 가조면 ‘생초’마을이라고 논증하였다. 이 논문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발표되고 2006년 연세국학총서66 『국어사연구 어디까지 와 있는가?』에 수록되었다.
참고로, 양주동(梁柱東)은 『증정 고가연구(增訂 古歌硏究)에서 우륵의 가야금 12곡 중 6.물혜(物兮)를 거창군 마리면에, 그리고 9.거열(居熱)은 거창에 비정한 바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卷 第三十一 雜誌 第一 樂 加耶琴.
『증정 고가연구(增訂 古歌硏究』, 양주동(梁柱東), 일조각, 1965.
『연세국학총서66, 국어사연구 어디까지 와 있는가?』, 태학사, 2006.

 


오 필 제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출처
  • 거창향토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