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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문화원

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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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시대

거창군의 조선시대 6.학문

ㆍ내용
거창의 역사적 변천과정

4. 조선시대

 

[학문]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표방하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 국가였다. 성리학은 고려 후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처음에는 철학적 사유 체계였으나, 고려 말 신진 사대부에 의해 정치 이념과 명분으로 표방되었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중요한 생활 규범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조선 후기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양반 문화의 근간으로 정착하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 주요 학문은 단연 성리학이라 할 수 있으며, 관료들도 성리학을 기본 소양으로 삼았다. 거창 지역 학문과 사상의 흐름도 성리학의 보급과 전개 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심화되는 것은 16세기 이후다. 그 이전에는 실천 윤리의 준수와 정치적 명분의 확립 등을 통해 학문적 밑바탕이 다져지던 시기였다. 이에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새 왕조 개창과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인사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으로 높게 평가를 받게 된다. 거창 지역에서는 고려 말 문신이었던 이원달(李元達)과 그의 사위 유환(劉懽)[1337~1409]이 고려 왕조가 멸망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창의 금원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훗날 거창 지역 사림들은 이 둘을 절의(節義)를 몸소 실천한 인물로 추숭하게 된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 대군(首陽大君)[세조]은 1455년(세조 1) 어린 조카 단종을 내치고 직접 왕위에 올랐다. 이에 사육신(死六臣)·생육신(生六臣)과 같은 절의 인사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세조에 저항하다 화를 당하거나, 관직을 버린 채 은거하기도 했다. 이에 이지활(李智活)[1434~?]과 같은 인물은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거창의 박유산(朴儒山)에 은거한 채 단종을 위해 통곡했다고 한다. 15세기 후반 왕위에 오른 성종은 문치를 지양함과 동시에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세력인 사림파를 중용하였다. 사림파는 더욱 강화된 성리학적 명분론을 바탕으로 훈구파와 대립하였지만, 연산군이 즉위하자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극심한 탄압을 당하게 된다. 이때 사림파와 관련된 인사, 연산군의 폭정에 염증을 느낀 인사들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다른 지방에 정착하였다. 당시 거창 지역에서는 사림파의 종장(宗匠)이자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한 김종직(金宗直)의 조카 김수양(金粹讓)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권시민(權時敏)[1464~1523]도 관직을 버리고 거창으로 내려왔으며, 김일동(金逸東)·이정희(李廷禧) 등과 같은 여러 인사들이 거창으로 돌아오거나 이곳에 정착하였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 중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인사는 김굉필과 정여창(鄭汝昌)이다. 이 둘은 김종직의 대표적인 제자로 훗날 문묘(文廟)에 배향된다. 이 중 김굉필은 거창과 인접한 경상도 합천군 야로현(冶爐縣)에 거주하면서 정여창과 함께 거창 지역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강학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당시 김굉필·정여창의 강학 장소로는 수포대(水瀑臺)[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도리 소재]가 있다. 또한 인근에는 거창 출신으로 김굉필의 동서인 최숙량(崔淑梁)[1456~1515]이 거주하였는데, 최숙량은 이들의 강학 활동을 도우면서 지역의 성리학적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물러가고 중종이 새로 즉위하였다. 중종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해 사림파 인사들을 중용하였고, 이들은 지치 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지방에 은거해 있는 인재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이에 1518년(중종 13) 사림파 인사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있던 김안국(金安國)은 경상도의 인재를 천거하였는데, 거창 지역에서는 변벽(卞璧)[1483~1528]·형사철(邢士哲)[1480~?]·형사보(邢士保)[1482~?]·유자방(柳子房)[1484~1540]이 추천을 받았다. 또한 1519년(중종 14)에는 변벽·형사보·유자방이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세기 중반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강조했던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림 계열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유(巨儒)가 배출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경상도에서는 예안(禮安)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진주(晉州)의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대표적인 인사다. 이들은 우리나라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시켰으며, 그 학문적 정신과 업적은 제자들에 의해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로 전승되었다. 15세기 후반 이래 사림파의 핵심 인사와 접촉하며 형성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16세기 중엽에는 많은 거창 지역의 인사들이 퇴계·남명과 교유하거나, 그들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 활동한 거창 지역의 대표적인 인사로는 임훈(林薰)[1500~1584]이 있다. 임훈은 퇴계·남명 등 당대의 명현과 교유하였는데, 퇴계가 있는 예안의 도산 서당(陶山書堂)에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기도 했으며, 조정에 관료로 있을 때는 퇴계의 중용을 건의하기도 했다. 같은 경상우도에 있던 남명과는 지역에서 만나며, 남명의 출처관(出處觀)에 공감을 표하였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거창 지역 성리학의 깊이는 더욱 심화될 수가 있었다. 한편, 퇴계와 남명이 직접 거창과 인근 지역을 찾기도 했다. 퇴계는 장인 권질(權礩)이 머무르고 있던 거창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장인이 있던 영송(迎送) 마을을 영승(迎勝) 마을로, 그리고 인근에 있던 수송대(愁送臺)는 수승대(搜勝臺)로 각각 개명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시를 지었다. 이로 인해 훗날 많은 저명인사들이 영승마을과 수승대를 찾아 퇴계의 정신을 기리기도 하였다. 남명은 진주와 합천 일대에서 활동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남명은 관직 생활을 하지 않은 관계로 제자들의 활동지가 경상우도에 집중되어 있다. 거창도 남명의 제자가 대거 배출된 고을 중 하나였다. 특히 남명은 거창과 인접한 화림동(花林洞)[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일대]과 지곡사(智谷寺)[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면 내리에 소재했던 사찰]에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거창에서도 많은 사림들이 화림동과 지곡사를 찾아 남명의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이 무렵 거창 지역 출신으로 남명의 제자가 된 인물로는 김신옥(金信玉)[1534~?]·정유명(鄭惟明)[1539~1596]·성팽년(成彭年)[1540~1594]·전팔고(全八顧)[1540~1612]·전팔급(全八及)[1542~1613]·문위(文緯)[1554~1631]·유중룡(柳仲龍)[1558~1635]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우국충정의 뜻을 가진 많은 사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남명의 제자들이 대거 포진한 경상우도의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남명은 이기론(理氣論)에 입각한 성리학적 이론 심화보다는 경의(敬義)를 바탕으로 한 실천을 중요시 했던 성리학자였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지자 경상우도의 많은 사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명의 제자였던 거창의 김신옥·정유명·성팽년·전팔고·전팔급·문위·유중룡 등도 임진왜란 때 경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도대장(義兵都大將)을 맡은 김면(金沔)도 남명의 제자였는데, 이들의 의병진(義兵陣)이 거창에 설치되었다. 이 또한 남명의 경의 정신을 계승한 제자들이 거창에서 많이 배출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특히 중국의 주인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어 갔고, 그 여파는 조선에까지 미쳤다.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견제하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게 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남한산성에서 항거하였으나, 1637년 끝내 청나라에 굴복하고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게 된다. 이는 많은 성리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통적인 대의명분과 질서가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나라에 의해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절개와 의리를 지키며, 자결을 하거나 고향에 은거해 버리는 관료와 성리학자들이 많았다. 이 무렵 거창 지역에서 절개를 지켰던 대표적인 인사로는 정온(鄭蘊)[1569~1641]이 있다. 정온은 정유명의 아들로 남명의 대표적인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온은 병자호란 때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고향 덕유산(德裕山)에 은거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정온의 절개는 후대 당색(黨色)과 학파를 불문하고 많은 성리학자의 칭송을 받게 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덕유산에 은거한 인사로는 훗날 문묘에 배향되는 송준길(宋浚吉)도 있었다. 송준길은 율곡학파(栗谷學派)의 학문적 적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로 덕유산에 머무는 동안 많은 필적(筆跡)을 남겼으며, 지역에서 여러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 거창 지역에는 퇴계학파·남명학파로 대표되는 영남학파(嶺南學派) 계열과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기호학파(畿湖學派) 계열이 공존하였으며, 지금까지 이러한 성리학적 학풍과 전통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한편, 거창 지역에는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한 향교(鄕校)·서원(書院)·사우(祠宇)·서당(書堂)·정사(精舍)·서숙(書塾) 등 많은 교육 시설이 있었다. 먼저 향교는 지방에 건립된 국립 교육 기관으로 ‘일읍 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각 고을마다 건립되었다. 향교의 구조는 교육 장소인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 제의(祭儀) 장소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대성전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중국의 명현들과 우리나라 ‘동국 18현’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이에 거창 지역에는 거창 향교(居昌鄕校)가 건립되어 지역의 교육과 교화를 주도해 나갔다. 향교가 조선 시대 관학(官學)을 대표했다면, 서원은 사학(私學)을 대표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서원도 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해 후진을 양성함과 동시에, 제의를 통한 교화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향교처럼 국가에서 정한 인물이 아니라, 지역과 연고가 있는 인물을 배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거창 지역에서는 17세기 이후 서원과 사우가 많이 건립되었는데, 현재까지 존재가 확인되는 조선 시대 서원과 사우로는 역천 서원(嶧川書院)·도산 서원(道山書院)·완계 서원(浣溪書院)·용원 서원(龍源書院)·구연 서원(龜淵書院)·성천 서원(星川書院)·영빈 서원(瀯濱書院)·병암 서원(屛巖書院)·양천사(陽川祠)·용천사(龍泉祠)·포충사(褒忠祠)·경충사(景忠祠)·학림사(鶴林祠)·정충사(靖忠祠)·창충사(彰忠祠)·상충사(尙忠祠)·금계사(金溪祠)·덕천사(德川祠)·화천사(花川祠)·오례사(悟禮祠)·충의사(忠義祠) 등이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거창문화원